작년에 보고 노트 한 구석에 적어놓은 <추락의 해부> 감상을 블로그에도 남기고자 글을 쓰게 됐다.
<추락의 해부>는 76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프랑스의 '쥐스틴 트리에' 감독이 연출한 작품이다. '추락의 해부'를 처음 볼 땐 몰랐던 사실인데, 주인공 역을 맡은 산드라 휠러는 지금보니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아내 역할로도 출연한 그 배우였다. 새삼 작품 선구안이 굉장히 좋은 배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작년에 개봉한 영화 중에서도 극찬을 받은 두 작품에 모두 출연했으니 말이다.
영화의 플롯 자체는 간단하다. 한 부부가 시력을 잃은 아들을 데리고서 조금 더 한적한 환경에서 업무에 집중하고, 그와 동시에 생활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적이 드문 외진 지역으로 이사를 하며 영화가 시작된다. 평화로운 생활이 반복되던 어느날 남편이 갑작스럽게 집에서 추락사하는 사고가 발생하게 된다. 그 후 이 죽음이 과연 자살인지 사고사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아내에 의한 타살인지를 밝혀나가는 것이 극의 주된 내용이다. 플롯만 언뜻 들으면 스릴러나 추리물을 떠올리기 쉽지만 그런 결의 영화는 아니었다. 오히려 법정영화 혹은 비극적인 가족영화에 가깝달까.
'추락' 과 '해부'
영화를 보고나면 <추락의 해부>라는 제목 자체가 영화 내용 상 중의적으로 해석되는 두 단어로 만들어졌다는 점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우선 '추락'이라는 단어는 단편적으로는 남편의 사인인 '추락' 그 자체를 의미한다. 하지만 동시에 잘나가는 작가였던 산드라가 남편 살인 혐의를 부인하기 위한 재판을 거듭하며 가정 내에서, 그리고 사회적으로 어디까지 '추락'하는지를 의미하는 중의적인 단어로도 보인다.
'해부'라는 단어도 흥미롭다. 사건의 전말을 밝히는 과정에서 화려한 커리어를 이어가는 작가였던 아내가 가정에서 어떤 엄마였는지가 밝혀진다. 가정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고, 집안과 관련된 일은 대부분 남편이 떠맡고 있었다. 반면 남편은 가정을 돌보느라 본인의 커리어가 제한되고 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아내에 비하면 보잘것 없는 커리어를 가지고 있어 그에 대한 열등감을 지닌 상태였다. 이런 불만은 점차 누적되어 부부간 갈등도 심화되었고, 이는 아내의 외도 및 남편의 우울증 등 다양한 형태로 개화한다.
법정에서 치열한 공방을 벌이면서 위와 같은 사실이 점차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밝혀지고, 심지어는 그 내용이 담긴 녹취록이 법정에서 아들 앞에서까지 공개되며 산드라는 인격적으로도 또 언론에 의해 커리어적으로도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해부'된다.
기본적으로는 남편의 죽음을 자세히 조사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을 '해부'라는 단어가 이처럼 발가벗기듯이 처참하게 개인의 치부를 온세상에 드러낸다는 측면의 '해부'로도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영화에서 기억에 남는 대사가 하나 있다.
최후 변론에서 증인 출석을 앞둔 다니엘은 엄마가 진짜 범인인지 아닌지 본인도 모르겠다며 혼란스러워한다. 그리고 제발 답을 알려달라고 재판정에서 파견한 담당자 마르주에게 눈물을 보이는 상황에서, 마르주가 다니엘에게 내뱉은 대사였다.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둘 중 한가지를 선택해야 할 때에는, 진실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것을 믿을지를 본인이 선택하는 것이다”
정말 인상적인 대사였다. 이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해 다니엘을 시각장애인으로 설정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영화 <추락의 해부>에서 남편이 왜 죽었는지 그 진짜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한 개인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후에 주변에 남은 것은 무엇인지를 통해 인생의 허무함, 고독함 그리고 중요시해야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하는 영화다.
재판에서 결국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그날 밤 심신이 너덜너덜해진, 한 때는 누구보다 잘나가는 유명작가였던 산드라의 곁에는 오직 강아지 스눕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화려한 커리어도 남아있지 않았고, 가정에 소홀했던 대가로 아들도 남아있지 않았다.
많은 것을 시사하는 엔딩이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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