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읽고 있는 김기태 작가의 [두사람의 인터내셔널].
어떤 책으로 독서를 시작할지 고민이 될 때,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는 책을 고르는게 가장 효과적인 접근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는 것은 적어도 최소한 읽을만한 책이라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니까.
[두사람의 인터내셔널]은 제목인 [두사람의 인터내셔널]이라는 단편을 포함한 총 9개의 단편을 묶은 단편집이다.
그 중에서 오늘 후기를 남기려고 하는 작품은 7번째로 수록된 [태엽은 12와 1/2 바퀴]라는 제목의 단편이다.
우선은 제목부터 심상치않다. 언뜻 들으면 해리포터에서 등장하는 9와 3/4 승강장이 떠오르기도 하는 신선하고 묘한 제목이다. 제목만 그런게 아니라 내용도 난해하다. 어느 닫힌 결말이 정해져있는것이 아니라, 이것저것 읽는 사람이 상상할 여지를 잔뜩 남겨둔 작품이다. 이런 작품이 읽고나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지만, 혼자 곰곰이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줘서 좋은 것 같다. 혼자만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으니까.
작품 전반적으로 쓸쓸한, 한편으로는 씁쓸한 분위기가 소설 내내 자욱하게 깔려있는게 인상적이다. 이 단편을 읽으며 꽂힌 키워드는 크게 3가지 정도가 있다. 하나는 괘종시계, 두번째는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없는 비닐봉지, 마지막은 작품에 직접 등장하지는 않는 딸이다.
우선 작품 속 배경은 양양 부근으로 추정이 된다. 바다 근처기도 하고, 최근 서핑을 하려는 사람들로 활력을 되찾은 지역이라고 하니까. 어렵지 않게 작품 배경의 모티브가 어딘지 알 수 있었다.
숙박업을 운영하는 주인공은, 인생에서 도전이라고 불릴 만한 것은 하지 않는 삶을 살아온 지극히 평범하고 보수적인 사람이다. 작품에서 주인공이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후회로 점철되어 있다. 예를 들면 여관을 팔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때 팔지 않고 그 뒤에 때를 놓쳐 주변 지역적 호재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 것, 아내와의 63빌딩 사진과 관련된 일화, 딸이 알려준 인터넷을 이용한 게스트하우스 관리도 소홀하게 한 것.. 등등 여러차례 삶에서 다른 순간을 맞이할만한 기회가 있었지만 주인공은 그런 기회들을 모두 외면하고 본인의 삶을 그저 관성적으로만 살아왔다.
이런 주인공의 모습이 첫번째 선정 키워드인 괘종시계와 닮아있다고 생각한다. 소설 속 괘종시계는 오랜시간 묵묵하게 여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가끔 시간이 틀리기도 하고, 제 기능을 못하기도 했지만 별다른 역할없이 그저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 결과 여관이 게스트하우스로 리모델링이 될때, 괘종시계는 힘없이 밀려나 구석 자리로 위치가 바뀌게 된다. 이런 괘종시계의 모습과 상황이, 모든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시대가 변하는 동안 이제는 핫플레이스가 된 양양 변두리에서 인기없는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신세로 전락한 주인공의 모습과 닮아있다.
소설 속에는 손님으로 등장하는 의문의 남성이 한명이 있다. 정확한 사연은 알 수 없지만, 과거의 기억에 이끌려 여관에 찾아와서 전에 묵었던 호실에 그대로 묵는 인물이다. 그리고 체크아웃을 할 때, 내용물을 알 수 없는 의문의 비닐봉지를 남기고 퇴실하는데 소설이 끝날 때까지, 이 비닐봉지 속 내용물이 뭔지는 공개되지 않는다.
이 의문의 손님은 주인공과 같은 처지의 사람을 의미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수많은 과거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과거에 묶여있는 사람. 그래서 이 손님이 두고 간 비닐봉지는 그의 후회나 아쉬움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 일부러 과거 좋은 추억이 있던 장소에 방문해서, 마지막으로 그의 후회나 아쉬움을 떨쳐내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소설에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주인공의 딸이 주인공의 입을 통해 수차례 언급된다. 나는 이 딸이 의외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던 주인공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의외성’을 담당하는 역할이었다고 생각한다. 딸 덕분에 여관은 게스트하우스로 탈바꿈했고, 소설 중반부에서 주인공이 오랫동안 머물러온 집을 처분하는 행위, 즉 그의 인생에서 몇가지 안되는 의외성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도 결국 딸에게 통화를 하고나서야 결정이 된다. 소설 내내 주인공이 딸을 애타게 찾고 그리워하는 모습을 그저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인생에서 본인이 갖지 못했던 '의외성'을 애타게 찾는 후회 가득한 사람의 모습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선정한 키워드들에 대한 감상은 여기까지하고, 무엇보다 시작부터 의문투성이였던 [태엽은 12와 1/2바퀴]라는 이 소설의 제목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이 제목이 무슨 뜻일지 소설을 읽은 후에도 한참을 생각해봤다. 12는 보통 완전함을 나타내는 숫자라고 한다. 1년이 12달인 것도 그렇고, 아서왕이야기에서 원탁의 기사도 12명이고, 예수 제자도 12명일 정도로 과거부터 12라는 숫자는 완전함 그 자체를 의미하는 숫자다. 그렇다면 뒤에 붙은 1/2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나는 이것이 ‘의외성’이라고 정의했다. 쉽게 말하자면 인생에 있어 ‘굳이’, 혹은 ‘도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모든 행위, 그리고 소설 속에서는 주인공의 딸로 대변되는 ‘의외성’ 이 모든 것들을 함축하고 있는게 이 1/2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은 결국 특별할 것 없이 계획대로 진행되는 완성된 12가 아니라, 그 뒤에 붙은 1/2 임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소설 도입부와 마지막에는 어느 두 청년이 등장한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바다에 들어가기 전, 그들은 각자 바다에서 위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 각자만의 방식으로 안전을 기원한다. 서로 티격태격하며 상대방의 방식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내가 파도에 휩쓸리면 네가 그분의 힘으로 날 구해. 만약 네가 위험해지면 내가 스트레칭의 힘으로 널 구할게”
라는 말로, 결국 서로의 방식을 이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나는 이 대사와 장면이, 인생에서 본인이 완전하다고 믿는 ‘12’만 수용하는게 아니라 본인에게 있어 의외성이라고 할 수 있는 ‘1/2’를 인정하는 모습이라고 봤다. 결국 작가가 전하고 싶었던 말이 이 두 청년에게 투영되어 있다는 것이 내 개인적 견해다.
나는 9편의 단편 중 이 작품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그건 아마도 다른 단편들과 달리 내가 상상할 여지가 많아서 책을 읽는동안, 그리고 읽고나서까지도 여운을 길게 남기는 작품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단편들도 좋으니까 한번쯤 읽어보시길..!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른 단편에 대한 감상도 남기려고 생각은 하고 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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