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를 휩쓸며, <살인의 추억>을 넘어 봉준호 감독의 대표작으로 자리 잡은 <기생충>이 개봉한 이후로 벌써 6년이 지났다. 오랫동안 봉준호 감독의 신작을 기다려온 입장에서 이번 <미키 17>이 개봉하자마자 빠르게 보고 왔다.
영화에 대한 본격적인 감상을 남기기 앞서 기본적인 정보를 먼저 살펴보면 주연으로 로버트 패틴슨이 캐스팅 되었다. 해리포터, 트와일라잇, 테넷, 더 베트맨 등등 굵직한 대중영화와 예술영화를 오가며 본인의 필모그래피를 차곡차곡 쌓아가며 연기력을 입증하고 있는 배우인만큼 캐스팅 되었을 때부터 기대감을 모았다.
그 외에도 너무나도 유명한 마크 러팔로와 스티븐 연, 그리고 <유전>, <나이트메어 앨리>에서 열연을 펼친 토니 콜렛 등등 배우진은 뭐 더할 나위없이 훌륭한 라인업을 자랑한다.
러닝타임도 136분으로 요즘 전반적으로 인플레가 심해진 신작들의 러닝타임을 고려하면 심하게 긴 편은 아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얼마 전 개봉한 <브루탈리스트>는 3시간이 넘고 인터미션까지 중간에 주어졌을 정도니 이 정도면 양호한 편이다(...)
다른 외부 평가의 영향을 받지 않고, 온전히 영화를 즐기고 싶어 사전에 어떤 정보도 찾아보지 않고 정말 백지같이 깨끗한 머리 상태로 보고 왔는데,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개인적으로는 기대가 너무 컸기 때문인지 조금 아쉬웠다. 아 물론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말하긴 했으나, 아쉽긴 했어도 봉준호 감독의 작품인만큼 완성도 측면에서 크게 흠결이 있거나 그렇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스스로도 감상을 마치고 영화관을 나설 때, 왜 기대만큼 큰 감흥이 없었는지를 집에 돌아와서도 천천히 다시 곱씹어봤다.
우선 기존 작품들과는 다르게 인물들의 선악구도가 명확하게 나뉘어진 점이 영화 전반적인 긴장감과 매력도를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잘 생각해보면, <살인의 추억>, <마더>, <기생충> 등 봉준호 감독의 대표작에서는 인물의 선악구도가 명확하지 않다. 대표적으로 바로 전작인 <기생충>의 사례를 생각해보면, 이선균 배우로 대표되는 상류층과, 송강호 배우로 대표되는 빈곤층으로 계층은 구분이 될지언정 영화를 끝까지 보고나면 과연 어느쪽이 선이고 악인지 보는 시각에 따라 제각각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영화를 소비하는 관객의 입장에서 이런 해석의 다양성이 영화의 풍미를 돋우는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번 <미키 17>은 이미 극 중 선악 구도가 명확하다. 그렇기때문에 관객의 상상력이나 해석이 개입될 여지가 극도로 제한된다. 물론 인물 간 선악 구도가 정해져있는 것이 잘못되었다거나, 영화의 재미를 무조건적으로 반감시키는 요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그동안 봉준호 감독 작품의 큰 장점이라고 생각이 되었던 부분들이 이번 영화에서는 드러나지 않아 상대적으로 아쉬웠다는 것이다.
미키 18
미키 18이라는 인물의 기본적인 성격을 생각해보면 마지막 미키 18의 마무리에는 분명 석연치 않은 부분이 존재한다. 미키 18은 작품 내내 공격적이고,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비록 티모(스티븐 연)가 미키에게 좋은 영향만을 주는 친구는 아님은 분명했고, 그로 인해 미키가 많은 피해를 봤다고는 해도 오랜 친구인 티모를 실제로 죽이려고 했던 것도 그렇고, 작품 분위기를 급격하게 바꾼 마샬 피습사건도 생각해보면 아무리 약을 한 상태였다고는 해도 미키18의 분노조절문제로 인해 발생한 일이었다. 작품 내내 충동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인 미키 18이 갑자기 마지막에 본인을 희생하는 선택을 하는 것에 도대체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요인이 무엇인지는 영화를 보고나서 한참을 골똘히 생각해본 지금까지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카이 캇츠
극 중 아나마리아가 연기한 카이 캇츠라는 인물이 대체 작품 내에서 무슨 역할을 하는지도 개인적으로는 의문이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기능적인 역할을 해야하는 건 아닐테지만, 카이는 다른 등장인물과 달리 유난히 조금 이질적인 느낌이 있다.
카이 캇츠가 등장하며 발생하는 사건들은 잘 생각해보면 스토리 전개에 아무런 영향이 없는 빈껍데기같은 에피소드들이다. 마샬과의 식사장면에서 카이가 처음으로 비중있게 다뤄지는데, 그때만 해도 카이가 다른 캐릭터와 달리 깨어있는 의식을 가지고 후반부 이야기 전개에 어떤 비중있는 역할을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미키를 사이에 두고 나샤와의 작은 갈등을 끝으로 그다지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비중있게 다뤄지지 않는다. 이 캐릭터의 활용 역시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물론 이번 미키17이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인만큼, 지금까지 내가 말한 아쉬운 점들이 소설의 문제라고 하면 나도 할말은 없다. 다만 소설을 3시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러닝타임에 녹여내기 위해서는 각색이 필수적인 만큼 영화화가 된 이상, 이런 단점들을 온전히 소설의 단점으로만 치부하기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사실 영화예술이 무슨 수학 공식도 아니고, 개연성이나 그런 것들이 모두 착착 맞아 떨어져야하는 것은 아니다. 시적허용으로 충분히 넘길 수 있는 부분이 당연히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렇게 단점들을 한번 나열해 본 것은 그저 왜 영화관을 나섰을 때 100% 만족하지 못했는지 나의 그 의문에 대한 스스로의 자문자답인 셈이다.
지금까지 비록 단점을 먼저 말하긴 했지만, 영화 자체는 분명 재미있었고 아쉬운 점 못지 않게 장점도 많은 영화였다.
우선 이번 <미키17>은 크게 죽음이라는 소재와 3D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대우 등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영화 분위기가 시종일관 통통 튀는 느낌이라 좋았다. 무거운 소재를 너무 진지하게 다루면, 보는 관객 입장에서는 조금 지치는 측면이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만화 <진격의 거인>이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음에도 호불호가 갈렸던 것이 바로 무거운 주제와 동반되는 작품 특유의 무거운 분위기였다.
하지만 다행히 <미키17>은 영화를 보는 내내 무거운 소재를 부담스럽지 않게 가볍게 잘 풀어낸 블랙코미디 느낌이 있어 보는 입장에서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런 점 때문에 한편으로는 분위기적으로는 영화 <돈룩업>과 유사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미키 17에서 미키 반스로
익스펜더블이라는 직업 명칭 그대로, 소모품 취급을 받던 미키가 점차 자존감을 되찾고 한명의 사람으로 인정받는 과정도 울림이 있었다. 익스펜더블로 우주선에 탑승한 미키는 영화 초반부터 같은 인간임에도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한다. 실수를 하면 마치 짐승을 대하듯이 식사 배급도 줄어들고, 근무량이 늘어나는 등 잔인할 정도로 험한 대우를 받는다. 이 과정에서 인간으로서 누구나 두려워하고, 기분 나쁘게 생각하는 죽음도 다시 리프린팅이 가능하다는 이유 하나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 희화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척박한 상황에서도 그의 가치를 알아주는 나샤나 도로시, 카이 같은 인물도 곁에 분명히 있었고, 그들의 도움으로 마침내 마치 실험용 생명체처럼 넘버링으로 이름이 불리던 미키17이 미키 반스라는 원래의 이름을 되찾는 과정을 통해 직업이 무엇이든 간에 인간은 누구나 존엄하다는 것을 전하는 듯 했다. 이러한 주제 메세지는 신분, 계층적 양극화를 비판한 전작 <기생충>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 외에도 이번 <미키17>에서는 크리퍼라고 하는 벌레같은 생김새를 가진 크리처가 등장한다. <괴물>, <옥자>에 이어 이번이 무려 세번째 크리처인 셈인데, 이쯤되면 봉준호 감독님이 크리처를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다… 심지어 이번 크리퍼는 생김새만 보면 혐오스럽게 생겼는데도, 영화가 끝나갈 무렵에는 귀엽게 보이는 걸 보면, 봉감독님이 이제 크리처 예술에는 도가 텄다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이번 <미키 17>이 봉준호 감독의 최고작은 아닐지언정 분명 재밌게 즐길 수 있는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하루 빨리 다음 작품이 개봉하길 기대해본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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